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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강하게… 부드럽게… 친근하게…그다음은?-한겨레(2012.2.10)

푸틴은 왜 ‘한번 더’를 외치는가

푸틴의 소프트 파워 전략

 

앞으로 23일. 러시아 대선을 앞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그는 오늘도 남한 면적의 170배나 되는 거대한 땅 러시아(1700만㎢)를 차로, 비행기로 분주하게 누비고 있다. 러시아 방송들은 거의 매일 밤 푸틴의 일거수일투족을 방영한다. 티브이 화면 속 푸틴은 러시아 시민들과 담소를 나누고, 공무원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리고 있다.
 

‘나라님’의 말씀 마디마디엔 뼈가 있다.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정교하게 계산된 포석이 놓여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재래시장에서 뻥튀기·떡볶이·어묵을 사 먹으며 ‘친서민’ 정책을 예고했고, 군용 점퍼를 걸치고 벙커로 들어가면서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엄포를 놓지 않았는가. 하물며 푸틴이다. 그는 현존하는 전세계 지도자 중 ‘둘째라면 서럽다’고 할 ‘이미지 정치’의 달인이다. 공산주의 이상을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카메라의 각도 하나까지 직접 주문했다는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최고라는 평가도 있다.
 

과장을 좀 보태면, 푸틴의 이미지가 곧 러시아였다. 새 천년을 하루 앞둔 1999년 12월31일,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전격 사임으로 혜성처럼 러시아 정계 중심에 등장한 그는 비상하는 강한 러시아의 상징 그 자체였다. 유도로 단련된 건강한 몸, 굳게 입을 다물고 쏘아보는 파란 눈의 푸틴은 술 취한 채 맥락 없는 말을 늘어놓던 노쇠한 옐친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옐친이 소련 붕괴 이후 휘청거리는 러시아였다면, 푸틴은 폐허를 뚫고 나오는 젊은 러시아 그 자체였다.
 

전투기 몰고 호랑이 잡던 손
피아노 건반 두드리더니
부정선거로 민심 들끓자
서민 환심 사는 눈 맞추기

국제유가 등의 상승에 힘입어 연 7%씩 쭉쭉 성장하던 푸틴 재임기(2000~2008년)의 러시아는 ‘전투기 모는 푸틴’ ‘근육질의 푸틴’ ‘호랑이 잡는 푸틴’ ‘기업가에게 호통치는 푸틴’ ‘바이크를 모는 푸틴’의 이미지로 다양하게 변주됐다. 러시아 유권자들은 70~80%에 이르는 지지율로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또 푸틴은 2010년 12월엔 샤론 스톤 등 유명 배우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푸틴’으로 변모했다. 그가 부른 건 애국적 정서를 담은 소련 시절의 노래 ‘조국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전세계가 경제 위기로 요동치는 시기였다. 강하기만 한 줄 알았던 이 남자는 부드러운 감성으로 옛소련의 ‘향수’를 자극했다. 이듬해 겨울엔 ‘스웨터 차림’으로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한 푸틴을 볼 수 있었다. 늘 편안한 재킷이나 점퍼 차림이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 스웨터는 2010년 여름 러시아 남부를 휩쓴 대형화재 진화를 직접 지휘해준 데 대한 감사 표시로 니즈니노브고로드주의 이재민들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 푸틴’의 탄생이다.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의 라승도 박사는 “3선 출마를 앞두고 푸틴은 기존의 딱딱하고 강인한 인상뿐 아니라 부드러운 감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소프트 파워 전략을 구사해왔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최근 그의 행보에선 ‘흔들림’이 읽힌다. 지난해 12월4일 두마(하원) 선거 부정으로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대도시에서 연일 반정부·반푸틴 시위가 거세지고 있어서다. ‘다 된 밥’이라고 생각했던 대선을 1차 투표 한 번에 끝내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도 또렷해지고 있다. ‘국민과의 대화’를 열어 “모든 투표소에 웹카메라를 설치하면 되겠느냐”(12월15일)고 달래봐도 여론은 들끓었다. 든든한 오른팔인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를 대통령 행정실 부실장 자리에서 내쳤지만(12월27일) ‘총선 결과를 재검토하라’는 목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서민 속 푸틴’ ‘국민의 얘기를 듣는 푸틴’의 모습을 강화하고 있다. 평범한 러시아인 여럿과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포착된다. 축구팬들을 만났고(1월19일), 경기장 내 맥주 판매 허용을 “검토해보겠다”는 말로 환심을 샀다. 대선 감시단에 참여할 젊은 법조인들과의 대담(2월1일) 땐 이례적으로 단상에서 내려와 그들의 눈높이에서 대화를 나눴다. 항공재킷을 입고 북서부 도시 티흐빈의 철도차량 기지(1월30일)와 우랄산맥 인근의 공업도시 첼랴빈스크(2월4일) 등을 잇따라 방문했다. 도시 중산층 엘리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자 지방의 서민 노동자 계층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에이피>(AP) 통신은 전했다.


민심을 달랠 ‘약속’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지난달 13일 연 대선 캠페인 누리집(putin2012.ru)을 통해 압제적인 현재의 공권력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적법한 비즈니스와 싸우는 공권력이 아니라 이를 보호하고 지원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같은 달 30일엔 고급 승용차와 호화 아파트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 빈부차를 줄이고, 공무원 부패 퇴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밝혔다. 또 지난 6일엔 “인터넷에서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얻은 사회적 안건은 의회에서 반드시 검토하도록 하는 규정을 도입하자”는 제안도 내놨다. 들끓는 민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모양새다. 하지만 푸틴의 이런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들은 많지 않다. 되레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심에 고삐를 조일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관건은 득표율이다. 러시아인물연구소의 권현종 소장은 “1차 투표에서 간신히 50%를 넘기거나 2차 투표까지 가는 신승일 경우, 푸틴도 시위대의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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